칼럼[조선일보] 차라리 ‘임기 단축 개헌’ 카드를 썼더라면 I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관리자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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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이 던진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는 영화만큼이나 강렬하다. ‘돌이킬 수 없는’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될 당시 끔찍한 폭력과 충격적 강간 장면으로 큰 논란에 휩싸였다. 한 평론가가 가스파르 노에에 대해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감독 중 가장 악마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이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역순으로 보여준다. 처음의 끔찍한 현실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의 행복했던 과거로 가면서 이젠 그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에 좌절한다. 미셀 투르니에는 ‘외면일기’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 그리고 또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라고 썼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비상계엄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우리가 피 흘려 만들어 온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우리 국민의 자부심을. 자신을 찍어준 모든 사람의 기대를 완벽한 배신으로 돌려줬다. 결국 윤 대통령은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자살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윤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칠 가능성보다 ‘조기 퇴진’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은 폭등할 것이고 지지율은 폭락할 것이다. 사방 어디에도 우군은 없다. “포위당한 대통령처럼 행동했다”는 BBC의 표현은 적절했다. 윤 대통령은 집권 이후 꾸준히 고립을 자초했다. 결국 혼자 남았다.

지금 이 순간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대 리스크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더니 이제는 보수 진영과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 책임은 가장 큰데 책임감은 전혀 없다. 윤 대통령은 4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추경호 원내대표, 한덕수 국무총리, 주호영·권영세·김기현·나경원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민주당의 폭거 탓이다. 폭거를 알리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이 해임을 요구한 김용현 국방부장관도 ‘자진 사임’으로 정리할 뜻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비상계엄설’을 제기했던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6개월 안에 승부를 내자”며 노골적으로 선동했다. 이미 야권은 지난 총선 때 “3년은 너무 길다”며 윤 대통령 조기 퇴진을 전략적 목표로 분명히 했다. 11월 15일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재판에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의 중형이 선고된 이후 ‘시간에 쫓기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에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채상병 특검’이나 ‘김건희 특검’의 우회로가 아니라 탄핵으로 가는 직진 코스로 진입했다.

‘하야’를 거부한 윤 대통령의 운명은 이제 한동훈 대표 손에 달렸다. 한 대표는 비상계엄 선포 직후 “요건도 맞지 않는 위법한, 위헌적인 비상계엄 선포”라며 “반드시 위법·위헌적인 비상계엄을 막아낼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친한계 의원들과 함께 막아냈다. ‘위법·위헌적 비상계엄’이라고 했으니 탄핵에 찬성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정치적·실존적으로는 쉽지 않다. 탄핵에 찬성하면 자신이 ‘범죄자’로 규정한 이재명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딜레마다. 또 보수의 궤멸을 불러올 ‘배신자’가 된다면 보수에서 잃은 지지를 넘어서는 지지를 다른 곳에서 얻어야 하는데 그게 전혀 안 보인다. 탄핵 반대 당론은 한 대표로서는 고육지책이다.

하야나 탄핵이 아니라면 ‘임기 단축 개헌’을 포함한 ‘질서 있는 퇴진’은 어떨까. 안철수 의원은 “탄핵만큼은 안 된다. 한번 탄핵을 경험하니 국민이 반으로 쪼개지고 나라도 혼란스러워지지 않았느냐”면서 “지금이 대통령이 결정할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며 질서 있는 퇴진을 요구했다. ‘질서 있는 퇴진’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야에도 있었다. ‘단계적 퇴진’으로 불린 질서 있는 퇴진은 ①대통령의 ‘기한을 정한 퇴진’ 선언 ②여야 합의 국무총리 임명·과도 내각 구성 ③조기 대선 일정 확정 ④ 대통령 사임 ⓹60일 내 차기 대통령 선출이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와 질서 있는 퇴진을 모두 거부한 결과, 탄핵됐다.

‘임기 단축 개헌’은 사실 민주당의 카드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카드로 쓸 수 있었다. 어차피 2032년에는 대선과 총선이 3월과 4월로 일치하므로 개헌의 적기다. 윤 대통령이 임기 단축 없이도 선제적으로 ‘정치 지도자 연석회의’를 주도해서 ‘개헌 특위’를 띄울 수도 있었다. 민주당이 임기 단축을 요구한다면 “좋다 내 임기를 1년 줄이겠다. 2026년에 대선 하자. 대신 국회의원도 임기 2년 줄여서 동시선거 하자”고 역제안했다면 민주당은 못 받았을 것이다. 얼마든지 ‘개헌 카드’를 쓸 수 있었는데 ‘비상계엄’이라니.

지금은 분명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위기 국면이다. 하지만 민주당도 마냥 꽃길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탄핵 사유가 충분하더라도 국민의힘 8명을 확보하지 못하면 탄핵 불가다. 한동훈 대표 선택에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운명이 달려 있는 형국이다. 탄핵이나 하야 없이 대치가 길어지면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가 다시 민주당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한동훈 대표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에게 탄핵이나 특검에 동조하지 않을 명분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극단적 대립이 한동훈 대표에게 공간을 열어주었다. 


원문 →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12/06/MV2SBPZ5XBGLJPE3SLVYG3OC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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